자유아시아방송에서 탈북자 김주원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손정도 목사’로 2019년 새해에 기록한 글입니다. 이 글은 북한에 사는 사람이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김일성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는 북한에서 김일성 회고록 제2권 제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 손정도 목사를 맨처음으로 언급하며 손 목사를 통해 입었던 은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정도 목사를 위키백과에서 검색하면 그의 일생이 자세히 언급돼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언급하면…
=독립운동가, 감리교 목사이다.
=손 목사는 1872년 혹은 1882년 유교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손정도의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
=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 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를 통해 평양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받고 면담하였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김형직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의 생부였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서로 아우님, 형님 하는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1912년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설교,노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예배당을 헌당하고, 한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이 무렵에 김일성과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31년 1월 해석은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공안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해석은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며 그를 석방시켰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였다.
이상이 위키백과에서 소개한 내용을 몇 대목 간추린 것입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이러한 내용은 잘 언급돼 있습니다.
==감옥을 나와 내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목사의 집이였다. 일곱달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온 손정도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것이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손정도목사도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내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있을 때 장작상에게 뢰물을 먹이면서 나를 석방시키기 위한 청원운동을 이끌고나간 주동인물도 바로 손목사였다.
==나는 평양에, 손인실은 서울에, 손원태는 오마하(미국)에, 우리는 반세기이상이나 서로 안부조차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1991년 5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시에서 병리학의사로 일하던 손정도목사의 막내아들 손원태가 우리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리유신)과 함께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손정도목사를 비롯하여 고원암, 오인화, 황백하와 같은 독립운동자들의 후원으로 감옥에서 제때에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10년쯤 옥중생활을 더하였을것이다. 10년만 철창속에 더 갇혀있었더라면 무장투쟁을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은 할아버지가 손정도 목사에게 입은 은혜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지리라 기대됩니다.
Stone Choi.